추억시 3

추억의 다림질 _ 정끝별

추억의 다림질 정끝별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 2023년 1월 10일 화요일입니다. 다림질을 할 때는 약간의 습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_ 이기철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 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

추억을 위한 레시피 _ 정경란

추억을 위한 레시피 정경란 오늘의 요리법은 굽기예요 당신은 여태 버리지 못한 아픈 기억 하나만 들고 오세요 제대로 굽기 위해선 불 조절이 중요해요. 너무 센 불에 두면 프라이팬이 먼저 타버리지요 아픈 기억도 어쩌면 서두른 탓인지 몰라요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기도 전에 너무 뜨거워진 당신을 들켜버린 건 아닌지 저요?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숯이 된 기억들을 버리면서 후다닥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겉이 먹음직스러우면 속이 날것이고 속이 익었다 싶으면 겉은 까맣게 타버리지요 저 여린 불꽃을 봐요 단단한 기억의 육질을 서서히 누그러뜨리는 은근함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온도가 필요한가 봐요 구수한 추억을 원한다면 먼저 당신의 심지를 조절하세요 * 2021년 8월 12일 금요일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