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시 63

유리창1 _ 정지용

유리창1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 2021년 12월 6일 월요일입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잊고 있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찬찬히 기억을 되새기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12월이라는 종착역 _ 안성란

12월이라는 종착역 안성란 정신없이 달려갔다. 넘어지고 다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달려간 길에 12월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하니 지나간 시간이 발목을 잡아 놓고 돌아보는 맑은 눈동자를 1년이라는 상자에 소담스럽게 담아 놓았다. 생각할 틈도없이 여유를 간직할 틈도없이 정신없이 또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남겨 버린다. 지치지도 않고 주춤거리지도 않고 시간은 또 흘러 마음에 담은 일기장을 한 쪽 두 쪽 펼쳐 보게 한다.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 하는 인생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어버리는 삶이라지만 무엇을 얻었냐 보다 무엇을 잃어 버렸는가를 먼저 생각하며 인생을 그려놓는 일기장에 버려야 하는 것을 기록하려고 한다. 살아야 한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두 가지 모두 중요하겠지만 둘 중 하나를 간직해야 한다면 살아 ..

눈풀꽃 _ 루이즈 글릭

눈풀꽃 루이즈 글릭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다른 꽃들 사이에서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 2021년 10월 29일 금요일입니다.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루이즈 글릭의 시입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

겨울나기 _ 도종환

겨울나기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 2021년 2월 17일 수요일입..

반쯤 깨진 연탄 _ 안도현

반쯤 깨진 연탄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 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

1월 _ 이외수

1월 이외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 2021년 1월 11일 월요일입니다. 끝까지 해낸다는 것이 성공의 최소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지속할 수 있는 최선을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은앙응앙 울을 것이다 * 2021년 1월 7일 목요일입니다. 어제 저녁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렸네요. 체감온도 영하 2..

겨울 고해 _ 홍수희

겨울 고해 홍수희 겨울밤엔 하늘도 빙판길입니다 내 마음 외로울 때마다 하나 둘 쏘아 올렸던 작은 기도 점점이 차가운 하늘밭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잠들었던 내 무딘 영혼에 날카로운 파편으로 아프게 박혀옵니다 사랑이 되지 못한 바램 같은 것 실천이 되지 못한 독백 같은 것 더러는 아아, 별이 되지 못한 희망 같은 것 다시 돌아다보면 너를 위한 기도마저도 나를 위한 안위의 기도였다는 그것 온 세상이 꽁꽁 얼어 눈빛이 맑아질 때야 비로소 보이는 그것 겨울은, 나에게도 숨어있던 나를 보게 합니다 * 2021년 1월 6일 수요일입니다. 동장군의 위력을 발휘하는 아침입니다. 건강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성탄편지 _ 이해인

성탄편지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히 받아 안기로 해요. 그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

겨울의 꽃을 피우네 _ 정유찬

겨울의 꽃을 피우네 정유찬 문틈 사이로 찬 바람 불고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미는 추운 날에도 훈훈하게 맘 쓰는 사람들 사랑스런 눈망울 맑은 웃음은 이 골목 저 골목 구불구불 돌며 향기로 가득한 겨울의 꽃을 피우네 세상이 어려워도 아름다운 마음 있으니 까마귀 깍깍 울어도 기쁜 소식 전해다오 까치야 * 2020년 12월 21일 월요일 절기상 동지입니다. 관계란 자신이 한 만큼 돌아오는 법입니다. 먼저 관심을 가져주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공감하고, 먼저 칭찬하고, 먼저 웃으면 그 따뜻한 것들이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