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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_ 배현순

산다는 것 배현순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새처럼 가벼워지는 일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 바다처럼 깊고 푸르르는 일 바람처럼 춤추는 일 꽃잎처럼 감싸안는 일 들풀처럼 다시 일어나는 일 햇살처럼 반짝이는 일이지요 때론 비처럼 울어도 볼 일 가랑비에 젖어도 볼 일 안개에 묻혀 숨어도 볼 일 이슬처럼 또르르 굴러도 볼 일이지요 벼랑끝에 핀 선홍빛 진달래 아스라이 피었다 지는 일 열두 폭 치맛자락에 엎어져 울다 울다 지쳐 꿈꾸어 보는 일이지요 * 2021년 11월 22일 월요일입니다.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생각은 말이 되고 행동이 되기 때문이죠. 좋은 생각으로 시작하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슬픔이 기쁨에게 _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2021년 11월 19일 금요일입니다. 앞..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_ 류시화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류시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마치 사탕 하나에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처럼 눈 앞의 것을 껴안고 나는 살았다 삶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그것이 꿈인 줄 꿈에도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사랑을 하고 또 헤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집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등 뒤에 서면 다시 한번 쳐다본다 책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고 내가 입은 옷은 색깔도 없는 옷이라서 비를 맞아도 더 이상 물이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무엇이 참 기쁘고 무엇이 참 슬픈가 나는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생의 집착도 초월도 잊었다 * 2021년 11월 18일 목요일입니다. 본질을 잃게 되면 정체성이 없어집니다. 잊었던 것들을 생각해..

지금은 우리가 _ 박준

지금은 우리가 박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 2021년 11월 17일 수요일입니다. 말은 쉽게 나와버리지만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_ 김선우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2021년 11월 16일 화요일입니다. 이해하는 것보단 체득하는 게 오래가는 법입니다. 부딪혀보고 체험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가을 산은 자유롭다 _ 유한나

가을 산은 자유롭다 유한나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욕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무수히 붙어서 푸름으로 치닫던 잎새들의 갈망이 끝났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집착을 버리기 때문이다 잎새들을 붙잡고 무성했던 나무도 움켰던 손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모두들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을 소유하고 있던 여름이 여름을 울던 풀벌레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산이 자유로운 것은 자라나야 한다든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묵직한 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 2021년 11월 15일 월요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남을 변화시키려면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법입니다. 한 주 힘차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너무 괜찮다 _ 박세현

너무 괜찮다 박세현 너무 괜찮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다 어젯밤 불던 바람소리도 바람을 긋고 간 빗소리도 괜찮다 보통 이상인 감정도 보통에 미달한 기분도 괜찮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 괜찮다 웃어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다 웃지 않아도 괜찮고 울지 않아도 괜찮다 유리창에 몸을 밀어 넣은 빗방울이 벗은 소리만으로 내게 오던 그 시간 반쯤 비운 컵라면을 밀어놓고 빗소리와 울컥 눈인사를 나누어도 괜찮다 너무 괜찮다 * 2021년 11월 12일 금요일입니다. 마음먹기따라 모두 괜찮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괜찮은 한 주로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가을서한 _ 나태주

가을서한 나태주 1 당신도 쉽사리 건져주지 못할 슬픔이라면 해질녘 바닷가에 나와 서 있겠습니다. 금방 등 돌리며 이별하는 햇볕들을 만나기 위하여 그 햇볕들과 두 번째의 이별을 갖기 위하여 2 눈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한 겹씩 옷을 벗고 나서는 구름, 멀리 웃고만 계신 당신 옆모습이랄까? 손 안 닿을 만큼 멀리 빛나는 슬픔의 높이 3 아무의 뜨락에도 들어서보지 못하고 아무의 들판에서 쉬지도 못하고 기웃기웃 여기 다다랐습니다. 고개 들어 우러르면 하늘, 당신의 이마 4 호오, 유리창 위에 입김 모으고 그 사람 이름 썼다 이내 지우는 황홀하고도 슬픈 어리석음이여, 혹시 누구 알 이 있을까 몰라 * 2021년 11월 11일 목요일입니다. 비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게 하고, 단점을 고쳐..

바람속으로 _ 유하

바람속으로 유하 바람은 허공일 뿐인데 왜 지나온 시간 쪽으로 내 발길은 휘몰아쳐 가는가 뒤돌아 보면, 살아낸 시간들 너무도 잠잠하다만 바람의 취기에 마음을 떠밀렸을 뿐 눈발에 흩뿌려진 별들의 깃털, 탱자나무 숲 굴뚝새의 눈동자 달빛 먹은 할아버지 문풍지 같은 뒷모습 산비둘기와 바꾸고 싶던 영혼, 얼마를 더 떠밀려 가야 생의 상처 꽃가루로 흩날리며 바람에 가슴 다치지 않는 나비나 될까 제 몸을 남김없이 허물어 끝내 머물 세상마저 흔적 없는 바람의 충만한 침묵이여 메마른 나뭇가지 하나의 흔들림에도 고통의 무게는 작용하는 것, 걸음이 걸음을 지우는 바람 속에서 나 마음 한 자락 날려 보내기엔 삶의 향기가 너무 무겁지 * 2021년 11월 10일 수요일입니다. 언제나는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에도 똑같다는 말입..

절정은 짧았지만 _ 박노해

절정은 짧았지만 박노해 단풍의 절정은 짧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얼마나 먼 길이었나 내 붉은 사랑은 짧았지만 너무 짧았기에 얼마나 오래가는 것인가 꽃은 짧고 단풍은 짧고 사랑도 젊음도 혁명도 짧고 짧은 절정이어서 여운은 얼마나 길고 깊은 것인가 얼마나 높고 깊이 살아오는 것인가 * 2021년 11월 9일 화요일입니다. 가을비와 함께 아침공기가 겨울로 가고 있습니다. 건강 챙기시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