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 955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_ 강미정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강미정 봄비를 받아내고 있는 작은 제비꽃의 흔들림은 꽃을 들여다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던 당신의 등처럼 외롭고 넓다는 것, 그러므로 꽃피어 혼들리는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땅을 움켜쥔 고단한 뿌리의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것, 그러나 흔들림이여, 제 필생이 가진 파란만장의 중심을 꿰뚫고 흔들어야 흔들림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작은 제비꽃 한 포기가 필생을 흔들어 세상의 침묵 위에 얹어놓는 저 파열하는 자주빛 몸부림도 고단한 뿌리가 가졌던 일그러진 얼굴이었음을 뿌리가 더듬고 나간 그 처음의 길에서 모든 흔들림은 오직 제가 가진 경계의 폭으로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제 필생을 흔들어 깨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모든 꽃은 뿌리에게로 간다 맨 처음에..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_ 도종환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도종환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거듭난 것들이 모여 논둑 밭둑 비로소 따뜻하게 합니다 참나무 어린 잎 하나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저를 이기고 거듭난 것들이 모여 차령산맥 밑에서 끝까지 봄이게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속에서 거듭납니다 저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 모여 이 세상을 아직 희망이게 합니다 * 2024년 4월 8일 월요일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기 마련입니다. 4월 10일 어마어마한 숫자를 기대해 봅니다. 홍승환 드림

나무 _ 신경림

나무 신경림 나무를 길러 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 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 2024년 4월 5일 금요일 식목일입니다. 나무들에 싹이 트고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제대로 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홍승환 드림

4월 비빔밥 _ 박남수

4월 비빔밥 박남수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 술에 산목련 향은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병아리 걸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 2024년 4월 4일 목요일입니다. 이제 정말 겨울옷들을 정리할 때가 온 듯 합니다. 봄을 흠뻑 맞이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_ 임영석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임영석 거미는 밤마다 어둠을 끌어다가 나뭇가지에 묶는다 하루 이틀 묶어 본 솜씨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어둠을 묶어 놓겠다고 거미줄을 풀어 나뭇가지에 묶는다 어둠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나뭇가지가 휘어져도 그 휘어진 나뭇가지에 어둠을 또 묶는다 묶인 어둠 속에서 별들이 떠오른다 거미가 어둠을 꽁꽁 묶어 놓아야 그 어둠 속으로 별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미가 수천 년 동안 어둠을 묶어 온 사연만큼 나뭇가지가 남쪽으로 늘어져 있는 사연이 궁금해졌다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따뜻한 남쪽으로 별들이 떠오르게 너무 많은 어둠을 남쪽으로만 묶었던 거미의 습관 때문에 나무도 남쪽으로만 나뭇가지를 키워 왔는가 보다 이젠 모든 것들이 혼자서도 어둠을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수천 년 동안 거미..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_ 김륭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김륭 앞마당 빨랫줄에 앉았던 새 한 마리 갸웃갸웃 삼십 촉 알전구보다 작은 머리에 불이 들어왔나 보다 전화 왔나 보다 눈도 못 뜬 새끼들 배고파 운다고 동네 시끄러워 낮잠 한숨 못 자겠다고 나무에게 전화 받았나 보다 포동포동 살찐 배추벌레 한 마리 입에 물고 날아간다 꽁지 빠지도록 새끼들 찾아간다 벨소리 그치지 않는 공중전화 한대 놓인 나무의 가장 따스한 품속, 둥지 찾아 날아간다 나무들 가슴 새까맣게 타도록 다이얼을 돌린다 전화를 한다 * 2024년 4월 1일 월요일입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봐야 비로소 넓은 물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야를 갖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멸치 _ 문순태

멸치 문순태 누가 너를 작고 못생겼다고 할까 너의 짧은 생은 참으로 치열했고 마지막 은빛 파닥거림은 장엄했다 너는 뗴 지어 다닐 때가 빛났고 혼자 있을 때는 늘 빳빳한 주검이었다 그 여리고 애처로운 몸으로 넓은 바다를 눈부시게 누볐던 너는 아직 내 안에서 희망이 되어 슬프도록 파닥거리고 있다 * 2024년 3월 28일 목요일입니다. 무언가를 반복하면 그게 바로 나 자신이 됩니다. 좋은 반복을 유지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당신 _ 유하

당신 유하 오늘밤 나는 비 맞은 여치처럼 고통스럽다 라고 쓰려다, 너무 엄살 같아서 지운다 하지만 고통이여, 무심한 대지에서 칭얼대는 억새풀 마침내 푸른빛을 얻어내듯, 내 엄살이 없었다면 넌 아마 날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열매의 엄살인 꽃봉오리와 내 삶의 엄살인 당신, 난 오늘밤, 우주의 거대한 엄살인 별빛을 보며 피마자는 왜 제 몸을 쥐어짜 기름이 되는지 호박잎은 왜 넓은 가슴인지를 생각한다 입술은 달싹여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는 밑둥만 남은 팽나무 하나 얼마나 많은 엄살의 강을 건넌 것일까 * 2024년 3월 27일 수요일입니다. 거리에 꽃망울들이 터지고 있습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짜릿한 봄을 기대해 봅니다.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