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 963

공갈빵이 먹고 싶다 _ 이영식

공갈빵이 먹고 싶다 이영식 빵 굽는 여자가 있다 던져놓은 알, 반죽이 깨어날 때까지 그녀의 눈빛은 산모처럼 따뜻하다 달아진 불판 위에 몸을 데운 빵 배불뚝이로 부풀고 속은 텅- 비었다 들어보셨나요? 공갈빵 몸 안에 장전된 것이라곤 바람뿐인 바람의 질량만큼 소소해 보이는 빵, 반죽 같은 삶의 거리 한 모퉁이 노릇노릇 공갈빵이 익는다 속내 비워내는 게 공갈이라니! 나는 저 둥근 빵의 내부가 되고 싶다 뼈 하나 없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 몸 전체로 심호흡하는 폐활량 그 공기의 부피만큼 몸무게 덜어내는 소소한 빵 한쪽 떼어먹고 싶다 발효된 하루 해가 천막 위에 눕는다 아무리 속 빈 것이라도 때 놓치면 까맣게 꿈을 태우게 된다고 슬며시 돌아눕는 공갈빵, 차지게 늘어붙는 슬픔 한 덩이가 불뚝 배를 불린다 * 2023..

흐린 하늘 _ 나금숙

흐린 하늘 나금숙 흐린 하늘은 많은 씨방을 가졌다 물알갱이로 된 씨방들은 가끔 제 부피를 견디지 못한다 기류가 일렁일 때 얇아질대로 얇아진 껍질이 터지곤 한다 산화하는 물방울들 물의 씨앗들 텀벙 물상 안으로 튀며 뛰어든다 사물들은 가슴께가 간지럽다 윤곽들 흐려지며 경계가 무너진다 흐린 하늘이 스며 사물들 모두 물의 씨앗을 갖는다 * 2023년 3월 23일 목요일입니다. 길가 여기저기에 노란 개나리가 제법 보입니다. 봄비가 내리고 나면 봄이 성큼 와 있을 듯 싶네요. 홍승환 드림

단단해지는 법 _ 윤석정

단단해지는 법 윤석정 물고기의 뼈는 가시라는 것 구운 생선을 발라 먹는데 가시 하나가 목에 걸려 꺼끌꺼끌할 때 문득 알게 된 것 그리운 것들도 가시라는 것 자꾸 마음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 빼내려 하면 할수록 더 아픈 것 마음의 뼈는 그리운 것 물고기처럼 마음도 뼈를 가지고 너에게 헤엄쳐 갔다 올 때 네가 내 마음에 걸린다는 것 목구멍에 걸린 가시를 배 속으로 꾸역꾸역 삼켰을 때 잊어야 한다는 것 그리운 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할 때 흐른 눈물의 뼈도 가시라는 것 가시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뼈를 감싸는 모든 살들은 물렁하다는 것 내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고 삼키려 할 때 단단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마음의 뼈는 물렁하다는 것 * 2023년 3월 22일 수요일입니다. 작은 가시 하나가 굉장히 불편할..

몽당연필 _ 한영숙

몽당연필 한영숙 내 안에는 아직 깎지 않은 새 연필 몇 자루와 쓰다 남은 심 부러진 연필들이 한증막 장작더미처럼 수북이 쌓여있다 어쩌다 절반 넘어 닳아진 몽당연필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널려 있는 커피 자판기 아무나 뽑아낼 수 있는 복제된 일회용 컵처럼 쓰다가 몇 번 부러지면 서슴없이 던져버리는 내 부러진 시간들 언제 한 번 진득이 끝까지 써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장작불보다 더 활활 타 들어가는 내 열정을, 꾹꾹 눌러 쓸 생애의 끝까지 써야 될 연필 몇 자루는 도대체 어디쯤 있을까 * 2023년 3월 21일 화요일입니다.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결과가 없는 법입니다. 끝까지 마무리 짓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신발 끈을 묶으며 _ 이수화

신발 끈을 묶으며 이수화 먼 길을 떠나려 할 땐 끈이 있는 신발을 신어야겠습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리고 삐걱이는 허리를 굽혀야 하는 불편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졸라맨 발목에서 숨이 콱콱 막히고 굵은 땀방울이 발등을 흐를지라도 거친 들길을 걸을 때에는 험난한 산길을 오늘 때에는 끈이 달린 신발을 신어야겠습니다. 어지간한 비틀거림에는 끄덕도 하지 않고 힘에 겨워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라도 또다시 발목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그리운 먼 길을 걸어갈 때에는 헐거워진 가슴을 단단히 조여 매고 아린 발끝을 꼿꼿이 세워야겠습니다. * 2023년 3월 20일 월요일입니다. 조금 불편한 것들이 더 튼튼할 때가 있습니다. 한 주의 시작 힘차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_ 김광섭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白鳥)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 2023년 3월 17일 금요일입니다. 꿈이 없는 삶은 지루하기 마련입니다. 작은 꿈들이라도 다시 시작하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새봄에는 _ 정성윤

새봄에는 정성윤 새봄에는 녹두 빛 하늘을 이고 시린 잎샘일랑 주섬주섬 걷어 올리고 부드러운 아지랑이만 몸에 걸친 채 한적한 산골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볼 것이다 그곳에는 지쳐버린 시간의 각질을 뚫고 새파란 기억의 우듬지가 이슬을 머금고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여린 풀밭이 있다 새봄에 부활하는 나의 가슴이 있다 * 2023년 3월 16일 목요일입니다. 나무의 꼭대기 줄기인 우듬지에 새싹들이 보입니다. 새봄,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_ 김철현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김철현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어려울 때 동행해 준 정이 있는데 나 좀 살만하다고 그 정을 매몰차게 내버린다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서로 의지하여 쌓아올린 신의가 있는데 나 좀 기분 나쁘다고 신의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친다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살다보면 할 수 있는 것이 실수라지만 내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근본도 없이 다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목숨까지 내놓는 맹세는 못할지라도 인생에 부끄럽지 않은 의리란 있는 법 내가 먼저 배신하는 못난 짓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 2023년 3월 14일 화요일입니다. "그러면 못쓴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혼난다"라고 굳게 믿습..

끈 _ 공석진

끈 공석진 불 끈 힘주는 팽팽한 욕망 질질 끌려갈 수도 툭 끊어질 수도 그저 당기면 밀어 주고 밀어 주면 당기고 애당초 끈은 탯줄에 의지하여 세상 밖으로 안내하는 생명선 숱한 인연을 나의 심장에 단단히 동여맨다 질 끈 * 2023년 3월 13일 월요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끈들이 새로운 결과를 만드는 법입니다. 질끈 인연을 동여매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봄날에는 _ 이희숙

봄날에는 이희숙 봄날에는 우리들의 시간이 봄꽃처럼 환하게 물들 수 있기를 기도하자 마주보면 부끄러워 고개 숙일지라도 밀어로 가득 찬 봄날의 속삭임을 노래하자 사랑하는 일이 나를 내어 주는 일임을 미처 다 알지 못한다 해도 닫혀있던 문이 절로 열리는 봄날에는 어여쁜 꽃송이 피워 올리는 마음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자 농담 같은 현실 때문에 동굴 속을 헤매는 날이 있어도 꽃피는 봄날에는 너도 나도 꽃이 되어 웃어보자 * 2023년 3월 10일 금요일입니다. 그래도 겨울은 가고 봄이 올 것입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