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시 1335

장자의 두꺼비 _ 권대웅

장자의 두꺼비 권대웅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장자가 일러주었다 두꺼비와 능구렁이를 보아라 알을 밴 두꺼비를 잡아먹은 능구렁이가 두꺼비의 독에 의해 죽고 오히려 죽은 두꺼비의 알은 깨어나 죽은 능구렁이 몸을 파먹고 두꺼비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두꺼비가 능구렁이에게 잡아먹히지만 실상은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일이 다 그와 같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 2024년 4월 22일 월요일입니다. 생각이 많아지면 용기는 줄어듭니다. 시작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햇빛이 말을 걸다 _ 권대웅

햇빛이 말을 걸다 권대웅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 2024년 4월 19일 금요일입니다. '언젠가'라는 진통제에 길들여지면 안 ..

봄 _ 김필연

봄 김필연 봄은 그 이름만으로도 달뜬다 예서 제서 쭈뼛거리는 것들 쭈뼛거리다 돌아보면 터지고 터지다 못해 무덤덤한 심장까지 쫓아와 흔들어대는 연초록 생명에 오색 꽃들에..., 하늘마저 파래 주면 꽃잎 날리듯 심장도 풋가슴으로 춤을 춘다 애먼 것 둘러대어도 이유가 되고 용서가 될 것만 같은 봄, 봄. * 2024년 4월 18일 목요일입니다. 멈추지 않는 이상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속도를 조절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행운목 _ 유홍준

행운목 유홍준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 행운은- 고작 한 뼘 길이라는 생각 누군가 이제는 아주 끝장이라고 한 그루 삶의 밑동이며 가지를 잘라 내던졌을 때 행운은 거기에서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거라는 생각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걸 발견하는 거라는 생각 그리하여 울며 울며 그 나무를 다시 삶의 둑에 옮겨 심는 거라는 생각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 행운은- 집집마다 수반 위에 올려놓은 토막이라는 생각 * 2024년 4월 17일 수요일입니다. 작은 기회와 인연으로부터 종종 위대한 업적이 시작됩니다. 편견을 버리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뒷심 _ 정끝별

뒷심 정끝별 모든 그림자는 빛의 뒤편으로 무너진다는데 모든 풀은 바람 뒤로 밀리고 바람 뒤로 눕는다는데 모든 줄다리기는 뒤편을 향해 당겨진다는데 모든 말은 침묵 뒤편으로 고인다는데 모든 사람들은 뒤가 실해야 당당히 설 수 있다는데 모든 사랑은 기다림 뒤편에서 완성된다는데 모든 그림자에게 뒤는 내려앉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풀에게 뒤는 맞서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줄다리기에서 뒤는 버티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말에게 뒤는 숨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뒤는 돌아보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랑에게 뒤는 젖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앞에 대항하는 바로 그 심心 * 2024년 4월 16일 화요일입니다. 비 내리는 세월호 참사 10주기입니다. 304명의 안타까운 넋을 기리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마음의 문 _ 윤성택

마음의 문 윤성택 문밖에 그가 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가늘고 긴 문장마다 초록의 단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가끔씩 바람으로 발음하는 햇살의 떨림이 들렸다. 나는 오래 전부터 빈집이었으나 누구도 들여놓지 못할 마음이 떠난 자리였으나 그는 문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이 문을 열어주고 싶다. * 2024년 4월 15일 월요일입니다. 꽃이 지고 나서야 초록이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오래된 기도 _ 이문재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기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

빗나간 말 _ 김귀녀

빗나간 말 김귀녀 빗나간 말 한마디가 내게로 왔다 세상이 어느 때인데 말 물음, 이 사람 저 사람 확인하는 나쁜 버릇 아직도 옛 모습이다 말, 말 말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데 말 끝은 그루터기로 남아있다. 가슴 구석에 마음 안에서 비틀거린다 마음이 진득거린다 살아가기 위해 하는 말 언어가 향기가 될 수는 없을까 꼭 필요한 말 '절대 그럴 수 없어'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쁜 말, 좋은 말 때로는 선한 거짓말도 모두 향기가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라면 살만하지 않을까 말 한마디가 가슴에 몹시 혼란을 준다 그 이튿날과 육 개월 후가 * 2024년 4월 11일 목요일입니다. 이겼는데 조금 찜찜한 기분은 사전 출구조사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_ 강미정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강미정 봄비를 받아내고 있는 작은 제비꽃의 흔들림은 꽃을 들여다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던 당신의 등처럼 외롭고 넓다는 것, 그러므로 꽃피어 혼들리는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땅을 움켜쥔 고단한 뿌리의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것, 그러나 흔들림이여, 제 필생이 가진 파란만장의 중심을 꿰뚫고 흔들어야 흔들림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작은 제비꽃 한 포기가 필생을 흔들어 세상의 침묵 위에 얹어놓는 저 파열하는 자주빛 몸부림도 고단한 뿌리가 가졌던 일그러진 얼굴이었음을 뿌리가 더듬고 나간 그 처음의 길에서 모든 흔들림은 오직 제가 가진 경계의 폭으로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제 필생을 흔들어 깨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모든 꽃은 뿌리에게로 간다 맨 처음에..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_ 도종환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도종환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거듭난 것들이 모여 논둑 밭둑 비로소 따뜻하게 합니다 참나무 어린 잎 하나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저를 이기고 거듭난 것들이 모여 차령산맥 밑에서 끝까지 봄이게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속에서 거듭납니다 저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 모여 이 세상을 아직 희망이게 합니다 * 2024년 4월 8일 월요일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기 마련입니다. 4월 10일 어마어마한 숫자를 기대해 봅니다.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