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시 1335

비는 느낌표로 내린다 _ 신현락

비는 느낌표로 내린다 신현락 사람 사는 일의 잡다한 말들에 지쳐 말을 놓고 싶을 때 문득 내리는 비를 본다 의자를 창에 가까이 대고 창틀에 턱을 괸다 떠오르는 한 생각을 지우며 비는 ! ! !로 내린다 앞서 떨어진 비를 지우며 연이어 내리는 비의 표정은 단호하다 못해 단순하다 나는 어떤 조짐도 읽지 않기로 작정한다 어떤 계시 같은 것은 더더욱이나! 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 비를 받는다 금세 빗물이 흥건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다 빗방울은 · · · 로 메모장에 떨어진다 누군가의 전화번호에 스미고 느리게 번져 가는 저 먹물의 고요한 전이, 풍요로운 물물(物物)의 교환, 말이 없으면 물물(物物)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말보다 사람의 일은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못해 오묘하다 젖은 대기에 스며드는..

종이봉투에 갇힌 길 _ 김종성

종이봉투에 갇힌 길 김종성 낙타는 물 냄새로 길을 찾아가고 연어는 모태 양수 냄새로 길을 찾아가는데 검지로 찍어 길을 가다 외길에서 방향을 잃었다 왼손가락으로 찍은 자음과 오른손가락으로 찍은 모음으로 조합한 언어들은 해부된 실험용 물고기처럼 너덜거리게 구워져 베틀에 걸 수 없게 날줄과 씨줄이 엉켰다 얼기설기 가건물에서 찍어내는 황금잉어빵 재료 조합도 반죽 숙성도 어설퍼 황금잉어라 이름 하기에는 부끄러운 몸뚱이는 종합문예지 발겨 만든 봉투 속에서 굳어가고 있다 한 때 뜨거운 몸으로 하늘도 땅도 품은 적도 있지만 바람 속의 갈대처럼 등줄기가 까맣게 그을려 촛농이 녹아 날개가 부러진 지금은 웃음 한 조각 슬픔 한잔 내려놓을 곳이 없어 외길에서 길을 잃었다 * 2024년 3월 6일 수요일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빨래집게 _ 김경복

빨래집게 김경복 겨울잔디 시린 발목 아랫목 이불 속으로 밀어넣듯 땅 밑으로 밑으로 오그리는데 바지랑대 치워버린 빨랫줄 빈 집게만이 쪼로록 참새새끼같이 떨고 있다 양말이며 청바지며 바람이 훔쳐 가겠다고 넘어올 때마다 '빼앗길 수 없어' 끝까지 악물던 입술 이젠 잿빛 산그림자만 물었구나 걷어진 빨래들과 그 욕심들은 서랍장 속에 개켜지고 흔들리는 건 가슴 속 풀냄새 바람도 낯설은 듯 등 돌리는데 진종일 싸락눈에 시달린 그 입술이 시려워 자꾸 내 입술이 깨물어진다 옷장 밑에 숨겨 두었던 옛날들을 다시 널어야 할 것 같다. * 2024년 3월 5일 화요일입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는 경칩니다. 봄을 준비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3월의 꿈 _ 임영준

3월의 꿈 임영준 눈의 띄는 대로 다 가두어 놓으리라 졸졸대는 개울도 종알거리는 멧새도 눈 부비는 토끼도 잠시나마 오붓하게 그러안을 수 있게 마법에서 미쳐 헤어 나오지 못한 산마루도 아지랑이 속에 으늑히 잡아 가두어 아름찬 봄의 미소를 반기며 단 한 순간도 어름거리지 않고 환호하게 하리라 난망한 이 녘도 가련한 저 녘도 * 2024년 3월 4일 월요일입니다. 반복은 실력이 되고 믿음은 기적을 낳는 법입니다. 새로운 달, 새로운 기운을 맞이하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추억의 다림질 _ 정끝별

추억의 다림질 정끝별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 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 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 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 2024년 2월 29일 목요일입니다. 방향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

젊은 날엔 남겨두라 _ 박노해

젊은 날엔 남겨두라 박노해 젊은 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눈물이었다 그랬다 내 젊은은 회한도 있었지만, 좋았다 남겨둔 것이 너무 많아서 갈수록 해낼 것이 많아서 젊어서 뭐든 다 해보라지만 채워도 채워도 다 채울 수 없고 더해도 더해도 다 해볼 수 없는 인생이고 삶이어서 난 모든 좋음이 파생되어 나오는 단 하나만을 찾고자 몸부림쳤고 단 하나에만 전념하고 헌신했다 열다섯에 사라질 것처럼 스무 살에 죽을 것처럼 그것밖에 몰랐다 그것만을 살았다 나에게 남은 건 내 살아온 역사와 애틋한 그리움과 많은 것이 남겨진 이 풍요 좋은 것들은 다 내 앞에 있다 남겨둔 생의 선물들이 위대한 생의 소재들이 오래 품어온 가능성과 희망들이 그러니 남겨두라 좋은 것들은 남겨두라 여백처럼 남겨두라 ..

못을 박다가 _ 신현복

못을 박다가 신현복 메밀꽃 핀 그림 액자 하나 걸으려고 안방 콘크리트 벽에 박는 못 구멍만 만들고 풍경은 고정시키지 못한다 순간, 그 구멍에서 본다 제 몸의 상처 포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벽 견디지 못하고 끝내는 떨어져 나온 조각들 벽, 날카로운 못 끝을 생살로 감싸 안아야 못, 비로소 올곧게 서는 것을 망치질 박힘만을 고집하며 살아온 나 부스러지려는 자신을 악물고 기꺼이 벽으로 버티며 견디고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 향해 몇 번이나 못질 했던가 꾸부러지지 않고 튕겨나가지 않고 작은 풍경화 한 점 고정시키며 더불어 벽으로 살기까지 * 2024년 2월 27일 화요일입니다. 만남은 인연이지만 관계는 노력입니다. 소중한 인연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뿌린 만큼 받는 양식 _ 하영순

뿌린 만큼 받는 양식 하영순 달콤한 사탕보다 고통의 쓴맛이 나를 키우는데 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난 후에 맑은 강물을 보듯 큰일을 치른 사람은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늘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복을 짓는다 생각하고 오늘이 행복하면 그동안 지어놓은 고통의 대가인 복을 받는 것이려니 그래서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세인들은 말들을 하지! * 2024년 2월 26일 월요일입니다. 무언가 잘 돌아가고 깨끗하게 유지되는 건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감사하는 하루 보내세요. 홍승환 드림

사랑하는 별 하나 _ 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 2024년 2월 23일 금요일입니다.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이루니까요.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

하얀 눈밭에 _ 하영순

하얀 눈밭에 하영순 시골길 하얗게 쌓인 눈밭에 강아지처럼 뒹굴고 싶어 자동차를 세워놓고 마음은 뒹굴고 나는 걸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옥양목 같은 눈밭 뽀드득 뽀드득 들리는 소리 눈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한참을 걷다 돌아오면서 그 말뜻을 알았다 이 형광등 네 발자국을 보라는 말이었구나 눈밭에 그대로 흘려 놓은 내 마음 살며시 지켜보는 저 햇살 에구 부끄러워라! * 2024년 2월 22일 목요일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보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