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 963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_ 유안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유안진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 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유안진의 ˝그리운 말..

바람이 부는 까닭 _ 안도현

바람이 부는 까닭 안도현 바람이 부는 까닭은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미루나무 이파리 수 천, 수 만 장이 제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 줄 알아야 한다고 * 2021년 2월 18일 목요일 절기상 우수입니다.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탓만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행동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겨울나기 _ 도종환

겨울나기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 2021년 2월 17일 수요일입..

종자 _ 박노해

종자 박노해 종자로 골라내진 씨앗들은 울부짖었다 가을날 똑같이 거두어졌건만 다들 고귀한 식탁 위에 오르는데 왜 나는 선택받지 못한 운명인지요 남들은 축복 속에 바쳐지는데 나는 바람 찬 허공에 매달려 온몸이 얼어붙고 말라가야 하는지요 씨앗들은 눈 녹은 찬물에 몸을 불리고 바람 찬 해토의 대지에 뿌려져 또 한 번 캄캄한 땅 속에 묻혀 살이 썩어내리고 뼈가 녹아내렸다 씨앗들은 침묵의 몸부림 속에 두 눈마저 감지 못하고 썩어 사라지며 숨이 넘어가는 최후의 그 순간, 마침내 자기를 마주쳤다 한 알의 씨앗이 수많은 불꽃이 되어 검은 대지에 피어나는 찬란한 새싹을 파릇파릇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위대한 첫 발을 내딛는 자신의 모습을 겨울에서 봄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한 생에서 영원으로 * 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마음 _ 김광섭

마음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 2021년 2월 15일 월요일입니다. 움직이는 것보다 먹는 양이 많으면 살이 찌는 법입니다. 행동하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걱정이 쌓인다고 하네요. 마음 먹은대로 행동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새해에는 _ 임영준

새해에는 임영준 ​ 새해엔 모두 부자되게 하소서 돈벼락을 맞아 입원한 사람들을 문안하느라 정신없게 하여주소서 새해에는 다들 정치인이 되게 하소서 특정인 몇몇이 다 해먹는 삼류국이 아닌 일등나라 사람으로 자부심을 갖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으로 넘치는 세상이게 하소서 콧대높은 여자도, 두 얼굴의 남자도 누구에게나 베푸는 약간은 에로틱한 사회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시간이 느려터지게 하여 주소서 한해가 다섯해만큼이나 늘어져서 지루한 중년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친구녀석들의 푸념에 질리게하여 주소서 새해에 이도 저도 이루어지지 못할거라면 그냥 지금 이대로 소시민으로 남게해 주소서 그것 뿐이외다. * 2021년 2월 10일 수요일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평소와 같지 않은 설연휴를 보내야 하지만,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

젊은 날의 초상 _ 송수권

젊은 날의 초상 송수권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아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젊은 날을 헤매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의 고통 끝에 폭설로 지는 겨울밤을 그대 창문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는 행복하다 그대 가슴속에 영원히 무덤을 파고 간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아, 젊은 날의 고뇌여 방황이여 * 2021년 2월 9일 화요일입니다. 열정과 도전정신이 없으면 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가장 젊은날입니다. 기쁜 우리 젊은날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강변역에서 _ 정호승

강변역에서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 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 2021년 2월 8일 월요일입니다. '하쿠나마타타' 걱정말라는 뜻의 스와힐리어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_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 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 2021년 2월 4일 목요일입니다. 모든..

반쯤 깨진 연탄 _ 안도현

반쯤 깨진 연탄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 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