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시 210

행복 _ 유치환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2021년 8월 19일 목..

애너벨 리 _ 에드거 앨런 포

애너벨 리 에드거 앨런 포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바닷가 어느 왕국에 애너벨 리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날 사랑하고 나의 사랑을 받는 일만을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바닷가 그 왕국에서.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습니다. 하늘의 날개 달린 천사들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 때문이었습니다.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서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한 것은. 그래서 그녀의 지체 높은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데려가서는 바닷가 이 왕국의 무덤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반만큼도 행복치 못한 하늘의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줄곧 질투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러기에(바닷가 이 왕국의 모든 이가 안답니다) 바..

무엇을 쓸까 _ 오세영

무엇을 쓸까 오세영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 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 2021년 5월 13일 목요일입니다. 인생을 연필로 쓰고 맘에 안 들면 지웠다 다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생의 빈 페이지를 신중하게 때론 과감하게 써 내려가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_ 백창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백창우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나비처럼, 딱새의 고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길 위를 소리없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내 안에 뭐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잊을 것 다 잊고 나면 나 가벼워질까 아무 때나 혼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사는 게 고단하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내가 한 걸음 내딛으면 세상은 두 걸음 달아난다 부지런히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한다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안개처럼, 바람의 낮은 노래처럼 가벼워져 길이 끝나는 데까지 가 봤으면 좋겠다 * 2021년 4월 14일 수요일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오마쥬한 시네요. 가벼움을 실천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사랑법 _ 강은교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2021년 3월 26일 금요일입니다. 가장 큰 하늘은 보이지 않는 등 뒤에 있는 법입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

백치애인 _ 신달자

백치애인 신달자 나에게는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별볼일 없이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다방에서 다방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물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또는 시장 속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다. 바보애인..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_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 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 2021년 2월 4일 목요일입니다. 모든..

혼자는 외롭고 둘은 그립다 _ 김현태

혼자는 외롭고 둘은 그립다 김현태 언제부턴가 혼자라는 사실이 괜히 서글프게 느껴진다면 그건 때가 온 것이다 사랑을 할 때가 온 것이다 꽃이 꽃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고 바다가 바다보다 더 외롭게 보이고 모든 사람이 아픈 그리움으로 보일 때 사랑은 밀물처럼 마음을 적시며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먼저, 자연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물 속에 핀 어린 나무의 그림자를 사랑해야 하고 하늘을 들었다, 놨다 하는 새들을 사랑해야 한다 파도를 일으키는 구름들을 사랑해야 한다 홀로 선 소나무는 외롭다 그러나 둘이 되면 그리운 법이다 이젠 두려워 마라 언젠가 찾아와 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랑을 위해 마음을 조금씩 내어주면 되는 것이다 * 2021년 1월 26일 화요일입니다. 혼자서는 빨리 갈 수 있지만 여럿..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은앙응앙 울을 것이다 * 2021년 1월 7일 목요일입니다. 어제 저녁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렸네요. 체감온도 영하 2..

수선화에게 _ 정호승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않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 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2020년 11월 26일 목요일입니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어릴 적 영웅들의 사망소식이 하나 둘 늘어남에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됩니다. 소중한 하루 알차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