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시 213

사모 _ 조지훈

사모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 2021년 9월 23일 목요일입니다. 5일간의 한가위 연휴 편히 쉬셨습니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열매를 맺는 하루 ..

즐거운 편지 _ 황동규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2021년 8월 27일 금요일입니다. 즐거움은 본인이 스스로 만드는 법입니다. 작심하고 의도하는 노력으로 주변을 즐겁게 하는 하루 되..

거듭나기 _ 김석주

거듭나기 김석주 어떤 것들은 잊혀지는 것도 괜찮을텐데말입니다 방금 마주친 눈빛은 오래전에 이별한 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땐... 그 눈빛이... 나의 전부였습니다 추억속에서 내내 머뭇거리다 이제야 잊을만했는데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도 버겁기만 합니다 이루지 못한 우리 사랑의 우연한 마주침 아픈 이별의 거듭나기... 작아지는 뒷모습을 마냥 바라보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정말 잊혀지는 것도 괜찮을텐데 말입니다 * 2021년 8월 25일 수요일입니다. 사람에게 기억을 잊어버리는 능력이 있어 미치지 않는다고 하네요. 나쁜 기억들을 잊어버리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행복 _ 유치환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2021년 8월 19일 목..

애너벨 리 _ 에드거 앨런 포

애너벨 리 에드거 앨런 포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바닷가 어느 왕국에 애너벨 리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날 사랑하고 나의 사랑을 받는 일만을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바닷가 그 왕국에서.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습니다. 하늘의 날개 달린 천사들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 때문이었습니다.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서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한 것은. 그래서 그녀의 지체 높은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데려가서는 바닷가 이 왕국의 무덤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반만큼도 행복치 못한 하늘의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줄곧 질투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러기에(바닷가 이 왕국의 모든 이가 안답니다) 바..

무엇을 쓸까 _ 오세영

무엇을 쓸까 오세영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 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 2021년 5월 13일 목요일입니다. 인생을 연필로 쓰고 맘에 안 들면 지웠다 다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생의 빈 페이지를 신중하게 때론 과감하게 써 내려가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_ 백창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백창우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나비처럼, 딱새의 고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길 위를 소리없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내 안에 뭐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잊을 것 다 잊고 나면 나 가벼워질까 아무 때나 혼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사는 게 고단하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내가 한 걸음 내딛으면 세상은 두 걸음 달아난다 부지런히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한다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안개처럼, 바람의 낮은 노래처럼 가벼워져 길이 끝나는 데까지 가 봤으면 좋겠다 * 2021년 4월 14일 수요일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오마쥬한 시네요. 가벼움을 실천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사랑법 _ 강은교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2021년 3월 26일 금요일입니다. 가장 큰 하늘은 보이지 않는 등 뒤에 있는 법입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

백치애인 _ 신달자

백치애인 신달자 나에게는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별볼일 없이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다방에서 다방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물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또는 시장 속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다. 바보애인..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_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 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 2021년 2월 4일 목요일입니다.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