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 963

새들도 언어로 소식을 전한다 _ 유진택

새들도 언어로 소식을 전한다 유진택 산속도 오래되면 등뼈가 휘어지는 법이다 산등성이마다 튀어나온 굵은 바위들이 봄날이면 몸살나게 뒤척인다 산등성이 곳곳에 박힌 굵은 뿌리를 홍역처럼 꽃망울을 앓아 피우고 고사목으로 굳어진 나무, 등뼈처럼 허리가 휜다 이 깊은 산속에도 진달래는 지천인데 그 꽃향기 아랫마을 내려가지 못해 산속에만 꽃내음이 가득 찬다 진달래 뿌리는 엉키고 엉켜 그 속에서 잔뿌리가 나고 꽃들도 지치고 지쳐 여린 꽃잎 다시 지는데 아무도 없는 이 산속 진달래는 왜 피는가 보아줄 이도 없는데 연지곤지 예쁘게 단장하고 분홍색 색동저고리로 손짓하지만 나는 잘 안다, 새들이 수시로 들락이는 저 산속 낙타처럼 누워 있는 산등성이로 와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몇마디 지껄이고 가면 진달래는 더 붉어 홍..

시간 _ 조병화

시간 조병화 시간도 머물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안은 묵묵히 흐르는 유구한 시간도 발을 멈추고 사랑, 그 옆에서 기다려주곤 합니다. 덧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허무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무정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잔인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속절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만큼 사랑 옆에선 발을 멈추고 시간이 중단된 우주를 마련해 주곤 합니다. 언제까지나, 그러다간 사랑이 지나가면 겉잡을 수 없는 시간의 속도, 아, 그러한 세월의 길을, 사람은 인생이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절없이. * 2022년 6월 8일 수요일입니다. 시간의 속도는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간을 조율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6월엔 내가 _ 이해인

6월엔 내가 이해인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유월 유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유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디어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 2022년 6월 7일 화요일입니다. 현충일 연휴 편히 잘 쉬셨나요? 쉼표 다음 문장을 잘 써 내려가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단호한 것들 _ 정병근

단호한 것들 정병근 나무는 서 있는 한 모습으로 나의 눈을 푸르게 길들이고 물은 흐르는 한 천성으로 내 귀를 바다에까지 열어 놓는다 발에 밟히면서 잘 움직거리지 않는 돌들 간혹, 천 길 낭떠러지로 내 걸음을 막는다 부디 거스르지 마라, 하찮은 맹세에도 입술 베이는 풀의 결기는 있다 보지 않아도 아무 산 그 어디엔 원추리 꽃 활짝 피어서 지금쯤 한 비바람 맞으며 단호하게 지고 있을 걸 서 있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잘 움직이지 않는 것들, 환하게 피고 지는 것들 추호의 망설임도 한 점 미련도 없이 제 갈길 가는 것들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 * 2022년 6월 3일 금요일입니다. 때론 단호하게 맺고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

파란 잉크 주식회사 _ 이중원

파란 잉크 주식회사 이중원 새초름한 잎사귀에 햇살이 내리쬐어도 버스가 남기고 간 잿빛의 연기만이 망막에 재고가 남은 유일한 색채일까 발 아래 선이 있고 내 뒤로 줄이 있다 느려지는 발자국을 억지로 잡아끌어 통근의 컨베이어에 실려 가는 유리병 모래알 흐르듯이 부서지는 빛줄기가 정류장 팻말 옆의 풀 허리에 한껏 고여 메마른 마개 틈새에 떨어지는 오전 10시 빵, 하는 경적음에 뜬 눈이 부시도록 생생하게 흔들리는 푸릇한 잡초들만 염가에 세일 중인 창공, 한없이 싱그럽다 * 2022년 6월 2일 목요일입니다. 새로운 한 달을 선물 받았습니다. 파란 하늘처럼 싱그러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내가 좋아하는 사람 _ 류시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류시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아는 사람 * 2022년 5월 31일 화요일입니다. 때론 현상을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으로 해석하는 ..

경고 _ 김제숙

경고 김제숙 마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철거합니다 진심 없는 간보기는 과감히 사절합니다 포장만 요란한 사랑은 영원히 결별입니다 여적 못 꺼낸 마음 버스 그만 떠납니다 쟁여놓은 시간들 유효기간 코앞입니다 인생은 리바이벌이 없습니다, 결단코! * 2022년 5월 30일 월요일입니다. 새로움을 원할 때는 기존의 편하고 익숙함을 버려야 합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풀잎에 맺힌 _ 성석제

풀잎에 맺힌 성석제 톡 떨어지고 톡 오가며 톡 마시고 먹고 톡 소리지르고 톡 해해거리고 톡 따고 톡 잃고 톡 집권하고 톡 실각하고 톡 죽는다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토독 토도독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톡 토독이여 너의 안녕이여 커다란 눈물 한 방울, 풀잎에 맺힌 이슬에 무엇이 다르랴 * 2022년 5월 27일 금요일입니다. 하늘이 예술 작품 같은 아침입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

장미의 저녁 _ 이윤정

장미의 저녁 이윤정 장미는 우리에게 저녁을 보여 준다 안쪽에 낯선 햇살이 있다 낯선 향기를 한 장씩 꺼내 준다 장미는 우리에게 입맞춤을 던진다 한 잎 두 잎 던지는 진한 입맞춤으로 저녁을 건내준다 내가 만나는 장미와 장미 사이로 저녁이 지나간다 장미는 장미 사이를 들여다보며 사람들이 걸어간다 내가 보는 장미와 장미가 보는 나 사이 하나 되는 순간에 저녁은 지나간다 기울어져 가는 저녁 사이로 장미가 핀다 당신으로 하여 저녁이 붉어지는 장미는 내일도 저녁을 들고 올까 나의 장미는 당신이 들고 오는 저녁이다 * 2022년 5월 26일 목요일입니다. 거리 곳곳에 붉은 장미가 한창입니다. 5월의 맑은 하늘과 함께 하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서울역 _ 유안진

서울역 유안진 나 자신이면서도 나 아니게 사는 나처럼 서울이면서도 서울이 아닌 여기는 세상의 한복판 벌집 쑤신 듯 팔도의 목청 제 빛깔대로 잉잉거리는 여기는 바람 일고 물결 엉키는 가슴팍도 한가운데 뒤웅박팔자들 어긋목지는 여기는 만남은 헤어짐과 떠남은 돌아옴과 동행되는 나란한 철길에서 문득 터득되는 세상살이의 이치 나 자신이면서도 나 아니어야 살 수 있는 나처럼 서울이면서도 서울이 아니어야 구실하는 역아 역아 서울역아 * 2022년 5월 25일 수요일입니다. 자유로움은 능력을 전제로 할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실력도 없고 열정도 없는 분들이 자유를 논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례와 허술함을 범하지 않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