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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_ 천상병

바람에도 길이 있다 천상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 2020년 10월 15일 목요일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 지는 자신만이 아는 법입니다. 맞는 길이 아니라면 바람처럼 맞는 길을 찾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_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2020년 10월 6일 화요일입니다. 모든 순간, 모든 사람이 꽃봉오리입니다. 꽃봉오리를 피우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달빛 기도 _ 이해인

달빛 기도 이해인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단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 2020년 9월 29일 화요일입니다. 삐딱하고 모난 마음들이 추석 보름달처럼 둥글게 됐으면 좋겠네요. 추석 연휴 건강하고 편안하게 보내세요. 홍승환 드림

가슴이 따뜻해서 아름다운 사람에게 _ 김진학

가슴이 따뜻해서 아름다운 사람에게 김진학 꽃이 피어나던 어느 날 기차여행을 처음하는 사람처럼이나 설레임으로 그대 앞에 다가가던 날 숱한 고뇌에서 피어난 눈위의 동백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곁에 오셨습니다 마주한 찻잔에 안개로 오르는 커피 내음처럼이나 향기롭게 준비된 내 사람이었습니다 아파 온 날들만큼 그대 사랑하리라 아파 온 날들 만큼 따뜻하리라 밤마다 부르는 장미의 노래로 서로의 가슴에 기대어 살아 갈 날들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아무리 험한 세상이 우리들 곁에 온다 해도 머물어 쉬지 않는 사랑의 눈빛이 서로의 가슴에 머물어 있는 한 * 2020년 9월 25일 금요일입니다. 일을 쉽게 잘 하는 것과 대충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과물은 이미 결정되는 법입니다. 한 주 마무..

아버지의 나이 _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 2020년 9월 24일 목요일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들을 만들지 않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밥 _ 천양희

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2020년 9월 23일 수요일입니다. 내로남불, 역지사지... 자신의 실수와 흠은 인정하기 싫은 법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본인을 돌아보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단풍 드는 날 _ 도종환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너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防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2020년 9월 16일 수요일입니다. 악한 사람도 늘 나쁜 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늘 좋은 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않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방문객 _ 정현종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2020년 9월 15일 화요일입니다. 생각이 익지 않으면 언행이 저속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을 전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만년 _ 황학주

만년 황학주 조용한 동네 목욕탕 같은 하늘 귀퉁이로 목발에 몸을 기댄 저녁이 온다. 만년은 갸륵한 곳 눈꺼풀 처진 등빛, 깨져간다. 눈꺼풀이 맞닿을 때만 보이는 분별도 있다. 저녁 가장자리에서 사랑의 중력 속으로 한번 더 시인이여, 외침조차 조용하여 기쁘다. 하늘 귀퉁이 맥을 짚으며 물 흐르는 소리에 나는 웃음을 참는다. 땅거미와 시간을 보내는 혼자만의 땅거미 무늬가 내게 있다. * 2020년 9월 14일 월요일입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모르는 사람과는 긴 인연이 불가능합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익숙해진다는 것 _ 고운기

익숙해진다는 것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 2020년 9월 11일 금요일입니다. 오래되고 익숙하기 때문에 편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더 이상 마스크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