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 963

아버지의 나이 _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 2020년 9월 24일 목요일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들을 만들지 않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밥 _ 천양희

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2020년 9월 23일 수요일입니다. 내로남불, 역지사지... 자신의 실수와 흠은 인정하기 싫은 법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본인을 돌아보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단풍 드는 날 _ 도종환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너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防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2020년 9월 16일 수요일입니다. 악한 사람도 늘 나쁜 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늘 좋은 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않는 하루 되세요. 홍승환 드림

방문객 _ 정현종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2020년 9월 15일 화요일입니다. 생각이 익지 않으면 언행이 저속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을 전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만년 _ 황학주

만년 황학주 조용한 동네 목욕탕 같은 하늘 귀퉁이로 목발에 몸을 기댄 저녁이 온다. 만년은 갸륵한 곳 눈꺼풀 처진 등빛, 깨져간다. 눈꺼풀이 맞닿을 때만 보이는 분별도 있다. 저녁 가장자리에서 사랑의 중력 속으로 한번 더 시인이여, 외침조차 조용하여 기쁘다. 하늘 귀퉁이 맥을 짚으며 물 흐르는 소리에 나는 웃음을 참는다. 땅거미와 시간을 보내는 혼자만의 땅거미 무늬가 내게 있다. * 2020년 9월 14일 월요일입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모르는 사람과는 긴 인연이 불가능합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익숙해진다는 것 _ 고운기

익숙해진다는 것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 2020년 9월 11일 금요일입니다. 오래되고 익숙하기 때문에 편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더 이상 마스크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

정지의 힘 _ 백무산

정지의 힘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2020년 9월 10일 목요일입니다. 정지할 줄 알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멈춤의 힘을 보여주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우산을 쓰다 _ 심재휘

우산을 쓰다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은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랜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 2020년 9월 9일 수요일입니다. 바람이 없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바람개비를 들고 앞으로 힘차게 뛰어가면 됩니다. 능동..

태풍 _ 나희덕

태풍 나희덕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꺽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 2020년 9월 7일 월요일입니다. 일을 처리해 내는 사람과 만들어가는 사람의 결과물은 다릅니다. 일을 만들어내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홍승환 드림

별 헤는 밤 _ 윤동주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2020년 9월 4일 금요일입니다. 오늘이, 앞으로 살아갈 날의 가장 젊은 날임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세요. 홍승환 드림